2018
Denial ‘Before’, Indeterminate “Still’
“부정의 이미, 부정적 아직” (Denial ‘Before,’ Indeterminate ‘Still’)
“Rather than putting a meaning to canvas, it was a time of denial, emptying and erasing meanings. Here, Denial is a process of searching for a meaning - those endless questions one asks on the way. This process denies ‘before’ as that which is already completed; it instead looks upon ‘still’ as that which is indeterminate.
- from the artist’s notes
“캔버스에 의미를 담기보다는 의미를 비우고 지우는 부정의 시간과도 같았다. 여기서 부정이란 어떤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의미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던지는 물음을 의미한다. 완결된 ‘이미’를 ‘부정(denial)’하여, ‘결정되지 못한(indeterminate)’ ‘아직’을 응시한다.”
-작가 노트 中-
Denial is bound to reach a limit at some point because denial must be anchored on that which is denied. As such, Suhyeon Kim’s fourth solo exhibition is a process of overcoming the artist’s self and starting a new journey - all transcending the limits of denial.
Kim’s cutting works began in New York in 2006. To the artist, that work was a process of denial: denial of meaning which was so casually put to works, and denial of that feeling of disconnect as if faced with a cliff. One can only assume that the pain which the artist must have felt was akin to that desire to deny and the extreme anxiety stemming from achieving that desire as in Henry Matisse’s <Le bonheur de vivre (1906)>. In other words, Kim had to deny all foundations, all that which imbued paintings with meaning, representation for value, all acts which were comprehensively called creative; and on that empty floor which the artist faced after her creative actions met bankruptcy, Kim must have felt anxiety and fear.
Between the old principles which had to be denied and distant new principles which are yet to come, the artist needed a breakthrough for gathering herself. More precisely, she would have needed something even if that fell short of offering a breakthrough. For the artist, an act of denial might have offered a better option than being pushed to indeterminacy. Kim recollects that period as “a sense of desperation as if fate blocked the way.” Thus began Kim’s drilling. Committing a knife to a tight canvas, although seemingly similar to Lucio Fontana’s challenge to the tradition of representation, is in fact heading in an entirely different direction: whereas Fontana’s works created a new form out of cuts, Kim began with specific forms, such as laces from her childhood’s memory, to achieve undecided, irregular forms - indeterminacy. The <Stone> series in the exhibition is titled so to express an intention of de-representation; like chiseling at a stone, small holes are sculpted into canvas. It is also Kim’s homage to Agnes Martin’s serene and meditative works.
Thus through an act which symbolizes both emptying and filling, the artist goes from denial to indeterminacy. She transcends ‘before’ to go towards ‘still.’ Through this slow and incremental but certain and continued change, the artist visualizes the ‘still’ of indeterminacy. Perhaps it is a sign of peace of mind; canvas which once blocked one’s view now has holes through which the insignificant reality can be observed. The artist’s vision appears to have expanded enough to betray the extinction of materials like melting paraffin; one wonders whether such progress is made possible by the peace of mind. Layers of paint on the surface, free flowing and stacked, once again confirms such observation. At the same time, the artist has become strong enough to see the problem of existence – that shabby, scared, and anxious behind of being. This is clearly seen in entertaining negative questions. Some have pointed to feminism or issues of materiality in Kim’s works. But reflecting on the progress of the last decade, and even if Kim’s questions include issues of sexual ideology and discussion of materials, it is certain that the artist was not buried in those matters. It is known that each of Kim’s works takes three to four months; each work is a record of questions that the artist asked herself at the intersection of ‘before’ and ‘still’ at least for a season. These questions extend to humanity and existence, universality, sacredness, and transcendence, refusing to be limited to any one of them.
Sangyoon Lee, art historian
부정은 언젠가는 한계에 봉착한다. 부정하는 대상에 닻을 내리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서연의 네 번째 개인전은 부정의 한계를 넘어서는 자기 극복과 새로운 여정의 시작으로 요약된다.
김서연의 ‘뚫기’ 작업은 2006년 뉴욕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에게는 이 작업 자체가 부정이나 다름없었는데, 하나는 작품에 익숙하게 부여되었던 의미에 대한 부정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이 막다른 절벽 앞에 선 단절감에 대한 부정이었다. 아마 이 때 작가가 느꼈을 고통은 앙리 마티스의 <생의 기쁨(Le bonheur de vivre)>(1906)에서의 부정하고픈 욕망과 이것이 성공하며 생긴 극도의 불안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다시 말해, 김서연은 그에게 기반이 되었던 것들, 회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가치를 위한 재현, 더 포괄적으로는 창작이라 불렸던 모든 행위를 부정해야 했고, 자신의 창작 행위가 부도를 맞게 된 다음 마주해야 했던 빈 바닥 위로,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하였을 것이다.
부정해야 했던 기존의 원칙들과 새롭게 세울 원칙의 요원함 사이에서, 자기를 추슬러야 했던 작가에게 돌파구가 필요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돌파구에 못 미치는 어떤 것이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작가에게는 무엇인가를 부정(否定,denial)하는 것이 부정(不定,indeterminate)에 내몰리는 것보다 나았을지 모른다. 김서연은 그 때를 회상하며, “운명이 막아선 것 같은 절박감”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뚫는 행위가 시작되었다. 팽팽한 캔버스 위로 칼을 대는 작가의 행위는 재현 전통에 도전한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의 행위와 표면적으로는 유사해 보일지언정,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폰타나의 작품이 칼집을 내는 것에서 점차 조형적이 되었던 것과 달리, 김서연은 유년 기억에 연관된 레이스 등의 특정 형태에서 출발해 비결정적, 비정형적인 형태, 즉 부정(indeterminate)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이번 전시에 발표된 <Stone>연작은 탈재현의 의미를 담은 제목으로, 마치 돌을 쪼듯, 캔버스의 작은 구멍을 조각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었다. 이는 또한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의 고요하고 명상적인 작품에 대한 작가의 오마쥬이기도 하다.
이처럼 작가는 비움과 채움 모두를 상징하는 행위를 통해, 부정을 넘어 부정으로 향했다. 이미를 딛고 아직으로 가고 있다. 느리고 미미하지만 분명하고 지속적인 변화를 통해, 그는 ‘부정의 아직’을 시각화하였다. 그 만큼 여유가 생겨서일까? 눈앞을 가로 막았던 캔버스가 이제는 뚫려진 구멍으로 인해, 그 너머에 숨겨져 있던 볼품없는 진실을 지켜볼 정도로, 파라핀이 녹아내리듯 물질의 소멸을 드러낼 정도로, 작가의 시각이 확장된 것은 이 여유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표면에 자유롭게 흐르고 겹쳐진 물감 층에서도 이것은 다시 확인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실존의 문제, 즉 초라하고, 두렵고, 불안한 뒤태를 직시할 만큼 견고해졌다. 부정적 질문을 유희하는 쪽으로 더욱 명확해졌다. 혹자는 김서연의 작품에서 여성주의나 물질성의 문제를 지적하기도 하지만, 지난 10여 년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 혹 그의 질문들이 성적 이데올로기의 문제와 물질에 관한 논의가 포함되었다할 지라도, 그것에 매몰되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최소 제작 기간이 3-4개월이라고 하니, 그의 작품은 적어도 한 계절 동안, 작가가 ‘이미’와 ‘아직’의 교차점에서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들을 오롯이 기록한 것이라 할 만 하다. 그리고 그의 질문은 인간과 실존, 또는 보편, 신성, 초월성으로까지 확장되며, 어느 것 하나에 국한되어 있기를 부정하고 있다.
미술사가 이상윤